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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 밖, 성저십리의 이야기: 서울 확장의 숨겨진 발자취

by 개공이 2025. 8. 26.

서울, 6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해 왔다. 우리는 주로 도성 안, 즉 사대문 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울의 역사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진정한 서울의 역사는 사대문 밖, 성곽을 넘어 펼쳐진 공간인 **성저십리(城底十里)**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성저십리는 조선 시대 한양 도성 성곽의 바깥 10리(약 4km) 이내 지역을 일컫는 말로, 한양의 행정 구역에 속하면서도 도성 안과는 또 다른 삶의 모습을 간직했던 곳이다. 이곳은 과거에는 한적한 농촌이거나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던 외곽 지역이었지만, 근현대화를 거치며 서울의 급격한 확장을 상징하는 핵심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 글에서는 성곽 밖 동네들이 서울의 확장과 함께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의미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 성저십리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것은 서울이 숨겨온 또 다른 얼굴, 그리고 도시의 끊임없는 진화를 이해하는 특별한 여정이 될 것이다.

성저십리, 도성 밖 또 하나의 한양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도성을 쌓을 때, 성곽 안은 궁궐과 관청, 양반들의 주거지로 채워졌다. 그러나 성곽 바깥 10리 이내 지역인 성저십리 또한 엄연히 한양의 행정 구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도성을 중심으로 외부의 경계를 설정하고, 유사시 도성 방어를 위한 완충 지대이자, 도성 내 인구 과밀을 해소하고 생활 물자를 조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성저십리는 주로 성곽의 네 대문(흥인지문, 숭례문, 숙정문, 돈의문) 밖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나, 한강 변을 따라 형성된 지역에 발달했다.

성저십리의 모습은 도성 안과는 확연히 달랐다. 빽빽한 기와집 대신 초가집과 논밭이 펼쳐진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 주를 이루었다. 이곳에는 농사를 짓고, 땔감을 구하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이 펼쳐졌다. 그러나 동시에 성저십리는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하여 다양한 교류가 이루어지는 활기 넘치는 공간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동대문 밖 청량리 일대는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오는 사람들이 한양으로 들어서기 전 머무르던 역참이자 시장이 형성되어 상업 활동이 활발했다. 숭례문 밖의 남대문 시장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물자들이 거래되던 거대한 장시(場市)였고, 이곳은 성저십리 중에서도 가장 번화한 지역 중 하나였다.

또한, 성저십리에는 도성 안에서 기피되던 시설들이 들어서기도 했다. 공동묘지나 전염병 환자들을 위한 공간 등이 주로 성곽 밖에 위치했다. 이는 위생 문제나 풍수지리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처럼 성저십리는 도성 안의 질서정연함과는 다른, 좀 더 자유롭고 역동적인 삶의 모습이 펼쳐진 공간이었다. 왕조의 통치 하에 있으면서도, 백성들의 생생한 삶과 애환이 담겨 있고, 한양이라는 거대 도시의 그림자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성저십리였다. 성저십리는 단순한 외곽 지역이 아니라, 한양 도성의 또 다른 얼굴이자, 서울의 뿌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근대화의 파도, 도시로 흡수되는 성저십리

조선 시대가 저물고 근현대화의 물결이 시작되면서, 성저십리는 서울의 급격한 확장을 가장 먼저 경험하는 지역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 전쟁을 거치며 서울은 무질서하게 팽창했고, 과거 성저십리 지역은 도시의 새로운 개발 축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철도와 도로가 놓이고, 새로운 주거지와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농촌 풍경은 점차 사라져갔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효율적인 식민 통치와 자원 수탈을 위해 서울의 도시 구조를 개편했다. 철도 노선이 성저십리 지역을 관통하며 새로운 역들이 생겨났고, 이 역들을 중심으로 상업 및 공업 지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용산역 주변은 철도 교통의 요지이자 일본인들의 거주지로 개발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또한, 기존 성곽 밖의 길들은 확장되어 새로운 도로가 되었고, 이는 도시 외곽으로의 접근성을 높여 주었다. 1920년대에는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성저십리 지역에도 주택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고, 도시의 모습이 점차 확대되어 나갔다.

한국 전쟁 이후, 서울은 폐허 속에서 재건의 과정을 겪었다. 특히 1960년대 이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의 압축적인 경제 성장은 서울의 무분별한 팽창을 야기했다. 도심의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성저십리 지역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공업화 정책에 따라 공장들이 밀집하면서 서울의 주요 산업 단지로 변모했다. 영등포, 청량리, 왕십리 등 과거 성저십리에 속했던 지역들은 서울의 부도심으로 성장하며 독자적인 상권을 형성하고 인구를 흡수했다. 이제 이 지역들은 더 이상 '성곽 밖'이라는 느낌보다는 '서울의 한 부분'으로 완전히 편입되었고, 과거의 농촌 풍경은 콘크리트 빌딩과 아파트 숲으로 뒤덮였다. 이처럼 성저십리의 변화는 조선 시대의 경계를 허물고, 끊임없이 확장하는 근현대 서울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면이었다.

오늘날 성저십리,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

오늘날 서울은 과거 성저십리 지역이었던 곳들까지도 도심의 일부로 완전히 흡수했다. 서울의 행정 구역은 훨씬 넓어졌고, 과거 성곽 밖 변두리였던 곳들은 이제 서울의 핵심 상업, 주거, 교통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지역들 곳곳에는 과거 성저십리 시절의 흔적과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서울의 깊은 역사를 상기시켜 준다.

예를 들어, 과거 성저십리의 중심이었던 남대문 시장은 여전히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 시장으로 남아 활기찬 모습을 보여준다. 고층 빌딩과 쇼핑몰 사이에 자리한 이곳은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상업의 전통을 간직한 채, 현대인들의 삶과 함께 숨 쉬고 있다. 또한, 옛 청량리역 주변에는 여전히 오래된 시장 골목과 낡은 상점들이 남아 있어 과거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비록 물리적인 모습은 크게 변했지만, 사람들의 기억과 생활 방식 속에서는 과거의 흔적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성저십리를 둘러쌌던 서울 성곽의 일부 구간들은 지금도 도시 곳곳에 남아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동대문, 숭례문 등의 사대문과 함께 남아있는 성곽길은 시민들에게 역사 교육의 장이자 도심 속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이 성곽들은 과거의 경계였지만, 이제는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성저십리의 이야기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하는 유기체임을 보여준다. 과거의 '밖'은 현재의 '안'이 되었고, 한적했던 시골은 번화한 도시로 변모했다. 이러한 변화는 서울의 강력한 생명력과 역동성을 증명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보존해야 할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 우리가 걷는 서울의 거리, 그곳의 건물과 골목 하나하나에는 수백 년 전 성저십리를 오가던 사람들의 발자취와 그들의 삶이 켜켜이 쌓여 있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진정한 얼굴은 사대문 안의 화려함뿐만 아니라, 성저십리의 끊임없는 변화와 그 속에 담긴 다채로운 이야기 속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성저십리는 서울의 과거, 현재, 미래가 교차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